조은지 Eunji Cho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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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_Mud Poem (2008 version)
Where is my L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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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_Mud Poem
They got paid and left to take a br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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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s
The Song of Sisters with Eight Eyes/ Jinshil Lee, 2020
Training the minds to go visiting Eunji Cho/ Eunna Bae, 2018
The Heat, the Wind: Eunji Cho’s Elemental Existentialism/ Heejin Kim, 2017
‘살아냄’을 그리는 아슬아슬한 풍경/ 김미정, 2017
Intimate Revolt: on Eunji Cho’s Falling Eggs/Ha Jin, 2016
Life and Earth/ Jang Un KIM, 2011
조은지의 진흙 퍼포먼스: 땅의 탈출에서 땅의 영매까지/ 최영숙, 2011
조은지: 언어를 거스르는 유쾌한 언어들/ 정은영, 2006
© Eunji Cho 2020
열, 풍 :
조은지의 엘레멘탈* 실존주의
김희진/ 시각예술 큐레이터, 미술비평
형은 흐름을 따른다
조은지의 아티스트 북『행동하는 시 Poem in Action』 첫 페이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Form Follows Flow” 세상에 가득한 모든 형태들은 생성과 변화, 소멸, 다시 생성의 사이클을 거치며 변해간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 形 은 본질적으로 가변형, 비정형이며 그 원형은 흐름에 통한다. 모든 형이 흐름에 통한다는 조형관에서 예술은 이미 정태가 아닌 동태다. 예술은 여러 요소들이 위치 이동하고 행동하며 관계를 벌이는 시간의 수행 행위가 된다. 이러한 시간의 수행 행위는 시간성을 몸이나 사물로 지각하면서, 별개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은 하나이고 상호 형성적인 것들, 예컨대 세계와 존재, 삶과 일상, 역사와 현재, 형과 흐름 사이를 이어 간다. ‘시간 기반의 과정으로서의 예술’은 다시 말해 구체적인 감각(형)으로 보이지 않는 질서(흐름)를 기술 articulate 해가는 행위이다. 시간 기반의 과정으로서의 예술이 본질적으로 삶 속에서 삶을 수행 perform하는 감각적 제의 행위이고, 존재의 실존에 대한 통찰에 닿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조은지는 ‘형은 흐름을 따른다’는 한 문장으로, 세계를 흐름으로 바라보며 시간을 감각적으로 수행하는 자신의 조형 의식과 예술관, 세계관을 피력한다. 그리고 이 문장을 마치 진흙이 말한 경구를 인용하듯 처리하여 이러한 자신의 조형의식과 예술관이 개인의 독자적 창안이라기 보다는 자연의 보편적인 윤리에 기인하고 있음을 지시한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를 수용하면서 그 본체가 물임을 아는 근원적 리얼리스트다.
사회-생태적 공모 행동
이러한 사유의 프레임에서, 나는 조은지의 구체적 관심이 사회-생태적 실존에 있다고 파악한다. 2008년부터 작가가 약 오년에 걸쳐 지속한 그의 ‘흙 작업’ 시리즈는 자본주의와 성장개발주의가 장악한 현대 도시의 특수한 이념적 공간에서 생명체들이 그들의 사회 생태적 실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행위들이라 정리할 수 있다. 작가는 특수한 공간과 형국에서 용도 폐기된, 혹은 가치 저평가된 존재를 공공의 가시권에 드러내고, 그들을 돕는 행위를 통해 그들과 자신의 실존적 존엄을 도모한다. 작가가 이들을 돕는 행위를 스스럼없이 공모 共謀 라 부르는 이유다.
작가와 공모하는 이들은 사회·정치·경제·문화적 약자일 확률이 높지만, 일찌감치 인간 중심주의를 비껴간 작가에게, 그들은 먼지부터 피폐해진 공사판 흙더미, 헐값에 매매되는 땅 조각, 잊혀진 소설에 등장하는 조연급 허구 인물, 뜬 장에 갇힌 유기견, 집단 폐사된 동물들의 체흔이 남아있는 구덩이의 흙에까지 이어진다. 대상의 범주가 시각과 촉각의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은 작가의 관심이 각 개체들의 물리적 실존상 보다는 그들의 사회-생태적 가치에 있음을 알려준다.
대상의 존재 감각을 드러내어 사회-생태적 가치를 기술하는 조은지의 상호 공모적 실존 행위는, 대상의 개별성과 그들이 처한 상황의 질감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다. 흙더미에서 흙을 탈출시켜 날려주고 알량한 측량술에 따라 부동산이 되어버린 땅에게 뜨거운 사랑의 사연을 입혀준다. 밋밋해진 언어에 리듬과 가락을 조합하여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 뛰어난 글쓰기 작가이기도 한 조은지는 행위의 대본, 지휘자의 악보, 선언, 오라클, 구술 노트 사이를 교묘히 떠도는 텍스트를 쓰는데, ‘행동하는 시’라 이름붙인 그의 텍스트에서 나는 문학 장르로 안착되기 이전의 시가 지녔던 풍부한 행위적 요소와 관계적 조형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조은지의 일련의 사회-생태적 행동 action 들은 관습과 정치경제적 이념에 포박된 체제의 생리적 불편함을 건드리는 불온한 정치적 행위가 되기도 한다.
엘레멘트와 생명 순환의 사이클
조은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스탠스는 정치적 저항이나 윤리적 당위성 보다는 자연이라는 상태의 리얼한 이치를 수행하는 입장에 가깝다. 노자가 액티비스트가 되고 생태철학이 사회적 행동과 하나가 되는 류의 스탠스다. 조은지의 퍼포먼스는 흐름을 드러내고 흐름을 되살리는 개입 이상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의 퍼포먼스에 기승전결의 구조나 인과논리에서의 서사적 엔딩을 찾을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 노래하고, 걷고, 날리고, 체조하고, 행진하고, 선긋고, 옮기는 그의 행위들에 대해 미술은 외형적으로 ‘미니멀’하다는 수식을 붙이지만, 기실 이들은 생명과 순환의 궤도에서 인위적으로 격리, 단절된 존재들을 보이지 않는 생명의 순환 사이클에 재진입시키는 최적의 행위들인 것이다.
조은지의 작업은 ‘70년대 서구 개념미술에서 발원한 일련의 시간 기반의 과정예술이 지닌 건조한 실존주의를 원초적인 행위와 즉물적인 감각 경험, 사회의식, 생태의식이 결합된 엘리멘탈한 실존주의로 전환시킨다. 이 지점에서 나는 조은지의 작업이 기타 정동의 행동주의 작업이나 감상적 휴머니즘과 차별화되는 그의 고유성을 발견한다. 그의 작업에는 오감 차원을 벗어난 원초적 질감이 있다. 그것은 각 요소가 지닌 생리나 감정, 음조, 의미, 일시적 형과 이미지가 만드는 피쳐 feature, 원자가 내뿜는 전자기장 등에서 기인한 것이다. 철학자 김상환은 이를 ‘질료적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원초적 질감이 형태를 호출하고, 작가는 그것이 생의 흐름에 닿고, 생의 흐름이 되도록 하는데 철저히 질감의 생리를 따른다는 것이다.
열, 풍
이번 신작 전시 ⟪열, 풍⟫에서 작가가 공모하는 대상은 사람이다. 사람의 피층 밑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는 열 熱과 풍 風 이다. 열은 따뜻한 체온과 그에 담긴 기운, 호흡이며, 풍은 몸을 움직이는 힘의 바탕이라 했다. 이것은 문학이나 종교의 수사가 아니라 과학이다. 앞서 살펴본 엘리멘탈 실존주의 프레임에서 유추해 보면, ⟪열, 풍⟫은 작가가 사람의 열과 풍 작용을 운위하여 사람이 다시 생명이 되도록 공모하는 구성일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사람’은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과 그것을 보는 우리, 두 그룹의 사람을 포괄한다. 조은지의 행위가 항상 공모 성격을 지닌 것임을 잊지 말자.
우선 ⟨낙하와 부활에 관한 감정적인 케이스 1⟩를 보자. 작가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뚝 뚝 떨어져 내리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풍경을 옆으로 훑듯 찍은 뒤 그것을 수직으로 전환하여 얻어진 효과라는 것을 파악한 후에도, 영상이 휘저은 울렁증과 현기증의 여진은 계속된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뭔가 급작스런 받은 쇼크를 증언하는 감각적 재연 reenactment 인 것 같다. 전시에서 가장 높은 열기를 뿜어내는 작품은 2채널 영상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구덩이와 의뭉한 웅덩이를 품은 풍경이 나란히 보인다. ⟨낙하와 부활에 관한 감정적인 케이스 1⟩에 등장했던 그 장소인 듯하다. 이어서 동남아시아의 중장년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카메라는 얼굴의 정면에서 계속 미끄러지며 그들의 신체 일부와 토막 동작의 모습을 담는다. 날카로운 눈매, 흔들리는 눈동자, 늘어진 목덜미, 야윈 손가락, 멜랑콜릭한 머리카락 등이 이들에게 한때 굴곡진 세월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혹 몇 개의 단어가 들리긴 하지만 작가는 의도적으로 인터뷰의 전모를 드러내지 않는다. 상황이 나른하고 희뿌옇다 싶은 순간, 마임이스트들의 마임과 나레이션이 시작된다. 마임은 갑작스레 맞은 살상의 순간과 눈앞에 죽음이 닥쳤을 때 느꼈던 공포, 불안, 모멸감을 격렬하게 표현한다. (나중에 작가로부터 영상에 등장한 이들이 인도네시아와 캄보디아에서 사오십년 전 발생한 집단학살의 생존자들로서, 이 두 역사적 사건은 그 전모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거나, 밝혀졌어도 역사청산을 해내지 못한 사건들임을 알게 되었다.)
앎, 비존재
⟨수행하는 사람들⟩에는 풍경, 신체, 동작, 목소리, 언어 등 여러 요소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구멍이 움푹 파이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로 포착된다. 이것은 이들이 실제로 형태가 불완전하거나 상처를 입어서 라기 보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앎’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지시한다.
우리는 여기서 앎과 비존재라는 화두를 직면하게 되는데, 비존재적 상태는 실제 무 無의 상태가 아니라 잘못된 앎에 의해 존재에 대한 실감이 멀어진 상태다. 조은지가 예전 작업에서는 사회-생태적으로 용도 폐기된, 혹은 가치 저평가된 비존재(혹은 그러한 상태와 가치)에 주목했다면, ⟨수행하는 사람들⟩에서는 사회정치적 비존재이면서 동시에 인지적 비존재에 주목한다. 인지적 비존재는 단순한 무지와 나태로도 초래되지만, 더 많은 부분이 왜곡된 앎에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탄생한 비존재는 그들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언어인 감정과 몸짓의 전달로 왜곡된 앎을 해체한다. 비존재는 감정과 몸짓과 같은 원초적 요소들로 존재감각을 획득하여 엘레멘탈한 실존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수행하는 사람들⟩에서 사건에 대한 부연설명이나 자막처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서사를 알고자 하는 외설적 욕구를 차단해 버림으로써 보는이가 적극적 ‘앎’을 수행하도록 유도한다. 정보적으로 사건을 파악하려는 이성적 시도는 허공을 떠도는 대신, 눈과 귀는 온전히 영상이 전하는 감정과 나레이션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탐사르포나 저널리즘이 전제하는 ‘앎’에의 신뢰와 대비되는, ‘앎’에의 의심, 도전, 해체와 재구성의 입장에 서있다.이렇게 <수행하는 사람들>에는 영상 속 비존재들의 수행과 보는 이의 ‘앎’의 수행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하나가 비존재들이 실존을 획득하기 위한 삶의 수행이라면, 또 하나는 비판적 ‘앎’, 성찰적 ‘앎’을 통해 비로소 실존에 진입하기 위한 수행이다.
고뇌의 공통 공간
⟨수행하는 사람들⟩은 두 개의 메시지를 전한다. 순수 고 苦 와 그 고통을 살아내는 시간의 수행이다. 고통을 살아낸다는 것은, 생존하기 위해 고통을 흘려보내는 상태가 아니라, 상처를 응시하며 시간의 경과를 온 몸으로 밟아가는 지각의 각성 상태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사람의 열과 풍을 운위하여 사람이 다시 생명이 되도록 공모하는 바가 조은지의 작업일 것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열은 곧 고 苦 요, 풍은 곧 고통을 살아내는 시간 수행이다. 비존재는 고 苦 로 자신의 실존을 획득해가고, 그 열과 풍을 감지하는 이들도 실존을 얻는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렀을 때, 세월호 사건 이후 삼년의 시간을 살아온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연두빛 생명이 무더기로, 거짓말 같이 스러진 그 봄 날 즈음,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끌리듯 조은지와 잠시 거처를 나누었다. 우리는 사건 이후 벌어지는 각종 유체이탈의 언어 농단과 외설적 폭력을 이를 악물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딱 한 번의 산행을 같이 했다. 우리는 드문드문 이야기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랜 도반처럼 걸었다. 잠시 바위에 머물렀다가 다시 흐름처럼 산을 내려왔다. 그 산행은 나에게 강한 기억으로 남는다. 되돌아보면 그 산행에서, 그때까지 산산히 부서지던 우리의 분노가 석류알처럼 바알간 실존적 고 苦로 익어갔던 것 같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그의 2016년 저서『사회학적 파상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파상 破狀 의 시대, 해답은 있는가. 상상력은 미래를 약속하는 힘이지만, 파상력은 어떤 미래도 약속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파괴되어가는 것들과 새로이 생성되는 것들을 사회적 가시권과 가청권으로 끌어내어, 고뇌의 공통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나누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실천원리들을 발견해내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파상력은 사회적인 것이 끓어오르며 새로운 길을 뚫는 장소, 그 어딘가에서 예기치 않은 희망의 씨앗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성되는 곳을 증언하기를 소망한다.”
삶의 수행
김홍중 식으로 말하면, 조은지의 ⟨수행하는 사람들⟩은 오십년간 삶을 수행해 온 아시아의 비존재들과 삼년 간 마음의 폐허 속에서 생명과 타자에 대한 앎을 수행하여 온 이곳의 비존재들이 접촉하는 고뇌의 공통 공간이다. 삼년 전 산행이 나와 조은지에게 고뇌의 공통 공간이 되었던 것처럼.
때마침 삼년이 지난 또 다른 봄 날, 비로소 뭍에 올라와 연일 옷가지와 핸드폰 등의 유품을 쏟아내며 생사가 오간 순간의 고통을 생생하게 토해내는 쇳덩어리 배를 떠올린다. 이제 그만하라고들 한다. 너무 고통스러워 볼 수 가 없다고도 한다. 유가족들이 정치화되었다고도 한다. 피해자들이 고통을 증언하며 순간을 수행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까. 그 고통을 나누는 것이 우리가 살고, 우리의 실존적 존엄을 되찾는 실천원리임을 우리는 알 수 있을까.
* elemental '기본적인, 근본적인, 자연력의, 광포한' 등의 뜻이 있다. 원어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음가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