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지 Eunji Cho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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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_Mud Poem (2008 version)
Where is my L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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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_Mud Poem
They got paid and left to take a br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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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s
The Song of Sisters with Eight Eyes/ Jinshil Lee, 2020
Training the minds to go visiting Eunji Cho/ Eunna Bae, 2018
The Heat, the Wind: Eunji Cho’s Elemental Existentialism/ Heejin Kim, 2017
‘살아냄’을 그리는 아슬아슬한 풍경/ 김미정, 2017
Intimate Revolt: on Eunji Cho’s Falling Eggs/Ha Jin, 2016
Life and Earth/ Jang Un KIM, 2011
조은지의 진흙 퍼포먼스: 땅의 탈출에서 땅의 영매까지/ 최영숙, 2011
조은지: 언어를 거스르는 유쾌한 언어들/ 정은영, 2006
© Eunji Cho 2020
1. Anna Lowenhaupt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29.
2. 예티(yeti)는 히말라야 산 속에 산다는 눈사나이로, 발자국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정체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3. Eunji Cho, <액체팔각>,
zineseminar, issue 01, 2019.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1/액체팔각/ )
4. Donna Haraway, Staying with Troubles-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ke University Press, 2016, 49.
5. Anna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2015, 27
6. Anna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2015. 27-8.
여덟 개의 눈을 가진 자매들의 노래
이진실
우리가 홀로 생존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하는 것은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특권이다. 1
- 아나 칭, <세계의 종말에서 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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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닥을 쓴다. 얼굴이 바닥을 맞댄다. 달팽이 같은 느린 숨을 따라 발끝이 저 멀리 뻗어나갔다가 품 안으로 오므라든다. 황금빛으로 가라앉은 밥상지구와 창백한 빛으로 떠있는 털 지구 사이를 오가는 퍼포머에게서는 숨소리도 사그락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 네 시간 동안 진행된 퍼포먼스 동안 발소리를 죽인 관객들이 오가며 숨죽여 그 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뜬다. 시간은 째깍거림을 멈추고 잠시 유예되는 듯하다. 퍼포머의 몸에 닿은 스코비 조각이 ‘툭’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해파리 촉수 같은 가느다란 털들도 춤을 춘다. 인화된 털들의 흑백 표면위에 퍼포머의 머리털이 포개진다. 둘 다 지긋이 구겨진다. 율동하지 않는, 자유롭게 유영하지 않는 몸뚱이는 꼬부라지고 꺾이다가 사지를 늘어뜨리고, 그리고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척추 없는 이들의 관능을 동경하며.
퍼포먼스의 처음과 끝을 온전히 관전한다는 것은 애당초 어려웠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들이 퍼포먼스의 찰나에, 살짝 늘어진 일시성에 잠시 물들었다 몸을 빼고 흘러나간다. 두 개의 지구 사이에서 이행 중인 시간 속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머무는 그 순간 만큼은 숨을 죽이고 감각의 조용한 소용돌이에 참여한다. 눈에 보이는 미세하고 느린 움직임을 조용히 좇다 보면 청각, 촉각과 같은 감각들이 구렁이처럼 살아난다. (바닥이 따듯하다) 반짝이는 스테인레스 주발 안에서 미묘한 울림이 퍼져나온다. 곧 나의 앞과 뒤, 위와 아래를 감싸는 사운드 파동에 귓바퀴의 솜털이 간지럽다. 손끝을 오므렸다 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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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수집한 털 이미지들 가운데는 길고 털이 보숭보숭한 집게 사진이 있다. 내가 그 생물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그녀는 수심에 따라 서식하는 바다생물들을 소개하는 귀여운 웹사이트 링크를 하나 보내왔다. 수심을 따라 한참 스크롤을 내려보니, 그 집게 다리의 주인은 무려 1650 미터 아래 심해 열수구 주변에 산다는 예티 크랩이었다. 심해 털게 여왕의 우아한 집게는 두 발 달린 히말라야 산 속 눈사나이의 궁색함을 비웃는 듯 찬란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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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눈은 좌측을 바라봅니다. 동시에 오른쪽 눈은 우측을 바라봅니다. 혹은,
왼쪽 눈은 위를 바라봅니다. 동시에 오른쪽 눈은 앞을 바라봅니다. 혹은,
왼쪽 눈은 앞을 바라보고, 동시에 오른쪽 눈은 뒤를 바라봅니다.3
여덟 개의 다리에는 촉수가 달려있다. 그것은 사실 세상을 알아가는 여덟 개의 눈이다. 만짐으로써 보기. 앞으로 뒤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그리고 비스듬히 보기. 잠자리의 눈처럼 더듬기. 문어, 거미, 팔방으로 뻗어나가는/침투하는 옥타곤 존재들의 촉수적 감각.
새로운 조우를 탐색하는 옥타곤의 언어는 원형을 지향하지만 닫힌 써클이 아니라 서로의 접촉과 반향을 열어놓은 잠재적 가능태를 상기시킨다. 그러한 가능태는 조은지의 작업에서 오래 전부터 등장해왔다. <Mud Blossom>부터, 아니 실은 <땅, 흙이 말했다>와 같이 진흙을 던지는 퍼포먼스에서부터. 그 외연은 흙, 별, 꽃, 밥상, 문어, 팔각 등으로 계속 변하지만 언제나 그 사물-언어는 유동적이고 끈적하며, 아주 평범하면서 세속적인 동시에 소박한 성스러움을 발산한다. 그녀에게 그것들은 단순히 명상을 위한 매개체가 아니라, 다른 감각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쌍둥이 자아를 만나는 문이다. 꽃, 가오리, 문어, 나방, 보살, 외계인이 서로의 다른 버전들과 연접하며 빙글빙글 돈다. 천 가지 그림자들의 만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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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의 노래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자매들의 노래
촉수를 가진 모든 테란들의 노래
2008년 경부터 지질학에서 제시된 ‘인류세’라는 지구적 시공간은 화석연료를 태우며 자원을 고갈시키고 생태시스템을 파괴한 인간의 종말과 지구의 위기를 환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나 해러웨이는 그 인류세란 용어에 고스란히 틀어박혀 있는 대문자 남성의 신화체계를 지적한다. "그런 나쁜 배우으로는 좋은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4 는 것이다. 아직 인류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은 지구의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고, 아직 직조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다시 상상되어야 한다. 인간 예외주의의 시각을 벗어난 많은 이야기들은 어떻게 직조될 수 있는가. 그 새로운 시점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것들을 버려야 할까. 어떤 변성의식들은 진정한 자기라는 환영을 붙드는 대신, 신과 같은 초월성을 향하는 대신, 다른 지구종들의 감각 세계로 인도할 수 있지 않을까. 여덟 개의 다리, 여덟 개의 눈, 여덟 개의 자아를 가진 자매들의 세계로 뛰어들기.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아포칼립스적 패닉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겪고 있는 살아감과 죽어감의 동시성을 사유하기 위해. 좋은 삶이 아니라, 좋은 죽음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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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털은 몸의 언어이자 피부의 언어다. 무생물의 땅과 생물의 피부에서 걷어내어지고, 파헤쳐지는 것. 표피의 깊숙히 박힌 동시에 그 위를 덮는 포근한 것. 비닐봉투에 담아 흘리고 다녔던 베를린의 흙, 예지동 시계골목에서 주워 모은 스테인레스 용기, 담배꽁초, 털 이미지들… 조은지가 긁어모으는 것들은 으레 정체성의 은유나 어떤 이들의 대리기표가 되곤 하는 것들이다(흔히 흙은 고향을, 털은 포유류와 영장류를). 하지만 그녀에게 이것들은 종種을 넘어 감촉과 형태가 각기 다른 ‘피부’이자, 안이면서 바깥이며, 경계임과 동시에 경계를 무화시키는 계기다. 그것은 미세한 조우가 일어나는 시간, 접촉과 공명의 지대다. 둥그렇게 둘러앉은 수집물들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경계를 떠나 어느 정도 보편성을 나눠 갖은 소우주가 된다. 조은지의 작업은 언제나 그렇게 나뉘어진 영역들의 매개를 통해 새로운 직조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수행의 성격을 띤다. “개더링은 언제 해프닝이 되는가”5 , 아나 칭은 그러한 계기가 타닥타닥 가늘게 타오르는 장소를 아상블라주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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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이행중’이다. 언제나 또 다른 대상으로, 또 다른 곳으로 느리게 움직인다. 진흙에서 꽃으로, 별똥별로, 밥상머리로, 재개발 골목으로, 바다로, 문어로, 쌍둥이로, 다시 지구로. 그녀의 작업을 지켜봤던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느끼겠지만, 그 과정은 전혀 다른 새로운 작업의 소재, 참신한 시도, 어떤 전환이나 분기가 아니다. 오히려 일련의 작업에서 주목했던 대상의 그림자, 혹은 짝으로의 전이轉移다. 그것은 그녀가 언제나 분열중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작업에 등장하는 흙도, 문어도, 별도, 지구도 그것들의 또 다른 국면으로 분열중이다. 때문에 작업에서 등장하는 기호적 메타포들은 언제나 이중적이다. ‘땅’이 지닌 의미와 그 사운드가 전하는 파열적/사건적 계기, 진흙의 비루함과 그 개화하는 형태의 역동성, <文魚魚文>에서 보이는 데칼코마니 형식과 그림자처럼 배어나는 흔적, 그리고 형상과 의미가 계속 전이되는 연쇄적 작동. 그것은 결코 대립의 구조도, 온전한 하나로의 통합을 위해 예비된 반쪽 찾기도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은 태어날 때마다 쌍둥이 문어 형제를 가진다.” 인도네시아의 신화에서 유래한 말을 좇아 바다로 달려간 그녀에게 운명같은 만남은 없다. 잠시 영문도 모른 채 바다로부터 끌려 나온 문어들과 공놀이를 하고, 만다라를 그리며 놀다가 다시 떠나보내는 것 뿐이다. 한 행성의 표면에 붙어 사는 지구종으로서 서로의 살아감과 죽어감을 잠시 응원하는 것이다. 2채널로 상영되는 <문어적 황홀경>에는 시간순으로 플레이되는 영상과 거꾸로 흐르는 영상이 쌍둥이처럼 맞붙어 있다. 두 개의 지구, 두 개의 시간은 인간/ 자연, 남자/여자, 정신/육체, 자아/타자, 깊이/표면, 이성/열정과 같은 이분법적 ‘쌍’이 아니다. 언제나 불완전하면서 되풀이되는 삶, 존재인 동시에 비존재인 생명들,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시간에 대한 돌림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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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지는 조각, 퍼포먼스,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생태정치적 모순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다. 단순히 ‘환경보호’나 ‘자연주의’와 같은 제안, 반대 논리, 혹은 대안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그녀의 작업들은 얕지 않은 감수성의 깊이로 인해 자본주의와 생태적 폐허 속에서 각자의 삶들이 지닌 모순과 복잡성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이 윤리적 결단보다는 정신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식이장애에 따른 결과라고 말한다. 그런 작가로서 <개농장 콘서트>와 <봄을 위한 목욕>과 같은 작업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냉엄하리만치 차분하다. 곧 도살당할 생명들 앞에서 백만송이 장미를 부르고, 정성껏 목욕을 시키는 제의적 행위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단단히 무장한 슬픔이 차오른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할 때 그럴리 없다고 화를 내는 제자들과 달리 그녀는 조용히 몰약으로 그의 발을 씻겼다고 한다.
생명을 살해해 먹거리로 만드는 일의 실체를 마주하기란 굉장히 겁나는 일이다. 해외의 채식주의자들은 때로 소나 돼지의 도살과정을 제대로 인식하고 폭로하고 바꿔나가기 위해 도살장을 찾는데, 이를 비절(vigil)이라고 한다. 순교자를 위한 철야 기도라는 종교적 어원을 지니고 있는 비절, 그야말로 애도와 결연한 증언의 시간이다. 아주 단단한 마음이 필요하다. 곧 죽임을 당할 존재를 위한 의식에는 눈물을 삼키거나 공포에 맞서기보다 냉기와 같은 것으로 스스로를 단단히 묶어야 할 것 같다. 어쩌지 못하는 자기연민에 울지 않고 진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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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마자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작업실 한쪽 구석에는 다양한 크기의 유리 항아리 안에 황갈색 액이 담겨져 있다. 항아리에 담긴 것은 ‘스코비SCOBY(Symbiotic Culture Of Bacteria and Yeast)’라는 종균으로 사람들에게 ‘콤푸차’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 신기한 액체버섯은 계속 발효되면서 응고된 셀이 되고, 가죽처럼 두껍게 자라난다. 그녀는 2018년부터 이 스코비로 여러가지 형태의 오브제나 아상블라주를 실험해오고 있다. 스코비는 막이나 점액질처럼 엉겨붙고 늘어지기도 하고, 공기중에서 더욱 딱딱한 껍질처럼 굳어지거나 죽은 동물의 가죽처럼 쪼그라들기도 한다. 그녀가 스코비에 ‘꽂힌’ 것이 단지 형태적인 유동성이나 신기함도, 예술가의 창조에 반하는 자연 소재의 결합 실험도 아닌 듯하다. 그녀는 장악할 수 없고 찢어지기 쉬운 대상을 조물거려본다.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우연성의 이야기를 한 코 한 코 떠나가본다.
스코비는 산호초와 닮았다. 그것들은 석화되지만 분명 살아있는 것, 살아있었던 것이다. 생물과 무생물의 범주를 넘어 보드라운 필멸의 존재가 물화된 것, 박제된 것으로서 우리 앞에 등장할 때, 그 생의 흔적과 그림자는 예술작품이라는 후광이 아니라, 낯선 감촉과 냄새로 우리의 폐부로 밀고 들어온다. 우리는 그렇게 작은 촉수적인 것들에 침투당하고, 포개짐으로써 비로소 또 다른 우리를 발견한다.
아나 칭은《세계의 종말에서 버섯》이라는 책에서 ‘협력으로서의 오염Contamination as collaboration’에 대해 말한다. “생존이란 무엇인가? 유명한 미국 판타지에서, 생존은 모두 타자를 물리침으로써 자신을 구하는 것이다. 미국 TV 쇼나 외계 행성 이야기에서 나오는 생존은 정복과 확장의 동의어이다. 나는 생존이란 용어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부디 이 다른 용법에 마음을 열기 바란다. 이 책은 (모든 종에게) 살아가는 일은 견딜 만한 협력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협력은 차이를 가로질러 일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오염으로 이끈다. 협력 없이는 우리는 모두 죽는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