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Julia Kristeva, La révolte intime – Pouvoirs et limites de la psychanalyse II. Paris, Librairie Arthème Fayard, 1997,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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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한 반란: 조은지 ⟨떨어지는 계란⟩

 

하진, 조형예술학 박사

 

Earth Thief

조은지는 흙을 떨어뜨린다. 작가는 베를린에서 “Earth Thief” 라는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그녀는 어느 지점에서 길을 걷기 시작한다. 걸으면서 흙을 구할 수 있는 곳을 만나면 비닐봉지에 흙을 담는다. 흙이 담긴 비닐 봉지는 구멍이 나 있어 걸어가는 작가 뒤로 흙이 술술 빠져 나간다. 흙은 때로는 긴 선을 만들고, 때로는 듬성듬성 떨어져 작가가 걸어간 자리를 표시한다. 작가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흙덩어리는 작가가 이곳을 지나갔음을, 작가의 움직임을 표시하지만, 그 표시는 다른 사람들과 지나가는 차들의 바퀴에 흩어지고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소극적인 표시이다. 그리고 비가 한 번 내리면 흙은 물에 씻겨져 다른 곳으로 다시 이동할 것이다.

도시의 거리에서 흙을 구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공사장이나 도로변이나 공터 등에서 봉지마다 흙을 보충한다. 비닐 봉지는 어느 도시에서나 노숙인에게 요긴한 물건이다. 그들은 비닐 봉지에 자신들의 세상을 담는다. 현대의 가공할 생산력에 의해 넘쳐나는 비닐 봉지는 어디에나 버려져 있고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다. 작가 조은지는 너무나 익숙하여 그 존재를 잊어버리는, 비닐 봉지를 취한다.

훔치는 행위가 성립하려면, 훔치는 것의 소유주가 명확해야 한다. 흙은 누구의 것인가? 인간이 처음으로 땅의 소유를 주장하면서,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은 곧, 누군가의 땅이다. 그것이 국가이건 개인이건 땅에는 주인이 정해져 있다. 그 땅에서 봉지에 담을 정도의 흙을 가지고 가는 것은 훔치는 행위인가? 다행히도 그 정도의 흙을 가지고 가는 것을 도둑으로 몰아 범법 행위라고 주장하는 이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흙을 훔치는 것이 아니다. 흙은 단지 장소를 이동할 뿐이다. 흙은 옮겨지기 위해 비닐 봉지에 담겨진다. 드디어 흙의 여행이 시작된다.

 

‘흙’과 ‘진흙’

진흙은 형태가 없는, 어떠한 인간적인 의도가 담기지 않은 ‘ 땅’에서 가질 수 있는 원초적이고 가장 단순하고 보잘 것 없는 물질이다. 그러나, 도시화가 급속도로 일어나고 있는 지금 우리의 도시 환경과는 가장 먼 물질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시대는 더 이상 흙의 원초성과 순수성을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이다. 흙은 중금속으로 오염되고 넘쳐나는 인간의 잔여물이 섞여든다. 우리가 흙을 밟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은 흙 위로 굳건히 세워진 도시를 무너뜨리고 파낼 때이다. 굴삭기는 ‘공사중’이라는 팻말을 세우고 아스팔트를 깨고 흙을 숨쉬게 한다.

2006년, 작가는 “흙과 나는 모종의 도모를 하였다.” 라고 시작하는 ⟨엑소더스_진흙 시 Exodus Mud Poem⟩를 쓴다. 작가는 흙의 탈출을 위해 흙을 정육면체의 덩어리로 변형하고 정육면체의 덩어리로 위장한 흙과 탈출한 후에는 흙에게 이별을 고한다. 정육면체의 덩어리에서 흙을 떼어내어 자유롭게 한다.

작가는 세상을 향해 흙을 던진다. 물이 적당히 섞여 점성이 높아진 흙은 벽과 바닥에 철썩, 철퍼덕 하는 소리를 내며 달라 붙는다. 흰 벽에 들러붙은 진흙은 시간이 흐르면 다시 먼지가 되어 흙의 길을 계속 갈 것이다.

 

세상에 던지는 것, 세상을 향해 던지는 것

벽에 흙을 던지는 행위를 기록한 사진은 또 다른 행위의 이미지와 겹치면서 우리에게 질문한다. 민주주의로 선출된 대표자가 절대 권력자가 되었을 때 그 권력에 대항하여 화염병을 던지는 이미지이다. 그 만큼 온 힘을 다하여 무언가를 던지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폭력적인 행위로 읽힐 수 있다. 그러 나, 그 무언가가 물이 적당히 섞인 진흙이고 흙을 던지는 대상이 작가 앞에 놓인 벽이라고 한다면, ‘던지는 행위’는 다른 맥락의 의미로 읽히게 된다. 벽에 흙을 던지는 행위는 ‘부정’ 의 행위이다. 흙을 던지는 대상에 대한 ‘부정’이다. 그 대상이 특정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던지는’ 행위에 더 주목해야 한다. 작가는 왜 던지는가? ‘왜’라는 질문의 답은 작가의 시 ‘엑소더스 진흙 시 Exodus mud poem’에서 찾을 수 있다.

 

“난 그리고 어딘지 모르지만 혼자서 발을 내딛었다.”

 

던지는 것은 부정의 행위이고 탈출의 행위이다. 탈출을 하여 벗어나야 하는 장소와 도달해야하는 장소는 특정되어 있지 않다. 탈출의 대상은 ‘검문’이라는 구조 그 자체이다. 나를 검문하는 세상의 구조로부터의 탈출이고 혁명이다. 진흙을 던지는 작가의 행위는 ‘내밀한(사적) 혁명’이 된다. 내밀함 (intime, intimus)의 어원은 내적인(interior)의 최상급 표현이다. 즉, 가장 내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다. 내밀함의 정의는 ‘어떤 존재의 가장 깊이 있는 것...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는, 가장 사적인 것’이다. 내밀함의 정의는 이와 같이 어떠한 공간의 안, 내부의 이미지를 이용한다. 우리가 내밀함을 이해할 때, ‘안’이라고 하는 제한된 공간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내밀함은 외적(exterior)인 것에 반대되는 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밀함은 공적(public)인 것과 사회적인 의미를 품을 수 있는 훨씬 넓은 의미로 정의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내적인 것’을 내면, 내부, 감추어진 것이라는 좁은 의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내밀함(intime)과 어원이 같은 동사 intimer의 의미를 살펴보자. 동사intimer는 ‘꿰뚫고 지나게 하다’ 나아가 ‘정신을 꿰뚫고 지나게 하다’라는 의미에서 ‘알게하다, 공지하다, 공고히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밀함intime과 공고히 하다intimer의 어원은 내밀함의 의미를 넓게 이해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내밀함(intime)에는 내적(interior)인 것에 더불어 외적(exterior)인 것을 함께 가지고 있다.내적인것과 외적인것의 공존이라는 맥락에서 자크 라캉의 extime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자크 라캉은 extime의 개념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공존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한 주체의 내부에 있는 외적인 것을 일컫는 개념이다. extime에는 두 종류의 서로 상이한 움직임이 있다; 외부로 나가려하는 내적인 것과 내재되어있는 외적인 것이다. 상호 방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extime이라는 개념은 ‘흙을 던지는 행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작가가 흙을 던지는 행위는 공적인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맥락과 맞닿아 있으면서, 작가 자신의 내적인 것을 공론화하는 행위이다. 내적인 것을 외적으로 분출하고자 하는 인간의 지극히 기본적인 욕망이기도 하다.

내밀한 관계는 작가의 물질에 대한 관계나 퍼포먼스에서 행해지는 몸의 관계에서 계속적으로 드러난다. 작가와 물질-흙이 갖는 내밀한 관계는 작업을 지켜보는 관객을 통해 어떠한 힘을 전달하고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흙 던지기와 흙 떨어뜨리기

⟨떨어지는 계란⟩에서 흙은 아래로 떨어진다. 퍼포머가 건물의 난간에 처덕여 바른 진흙 덩어리가 중력에 의해 아래층 바닥으로 떨어진다. 진흙은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떨어지면서 중력의 작용으로 더 극대화된 소리를 만든다. 흙을 던지는 사람의 힘이 아닌 흙이라는 물질 자체가 가진 무게가 더해져 바닥에 떨어지고 건축물과 만난다. 흙을 ‘던지는’ 행위와 흙을 ‘떨어뜨리는’ 행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흙을 던지는 행위가 사람의 힘을 가하는 의식적인 행위라면, 흙을 떨어뜨리 는 행위는 인간의 의지와 행위에서 자연의 현상에 움직임을 맡기는 일이다. 흙을 움직이게 하고 이동시키는 동력은 인간의 힘이 아닌 자연의 현상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흙이라는 물질을 물질 자체로 받아들이고 움직임을 움직임 그대로 받아 들이려 한다. 흙을 던지는 Exodus_진흙시의 행위에서 읽히는 인간의 적극적인 의지가 실린 행위가 아닌,어떠한 움직임이 일어나도록 유도하는, 흙이 떨어지도록 유도하는 움직임의 장(場)을 마련하는 행위이다.

⟨떨어지는 계란⟩은 흙의 퍼포먼스와 몸의 퍼포먼스로 이루어진다. 몸의 퍼포먼스에서 남자와 여자, 무표정한 연기자 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덩어리를 만든다. 각각의 몸이 갖는 경계와 한계를 연결하고 확장하는데, 연결은 몸의 특정한 부위를 한정하지않고 몸과 몸의 모든 부분이 부딪히고스치고 쓰다듬고 따라간다. 몸은 진흙이 지닌 연결고리와 같이 느슨하게 그러나 흩어지지 않고 덩어리로 움직인다. 사람의 덩어리와 흙의 덩어리는 서로 어긋나면서도 하나가 된다.

흙의 움직임과 몸의 움직임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돌고 구르고 엮인다. 몸의 퍼포먼스에서 각각의 몸은 움직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 같지 않다. 하나의 움직임이 그 다음의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이 움직임은 연결되는데,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움직임이다.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각각의 몸은 서로를 스치고 당기고 끌려가고 끌어오며 움직임을 이어가는데 거기에 의지의 힘은 작용하고 있지 않다. 몸과 몸은 서로의 피부의 세포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듯하다. 몸과 몸, 몸과 사이, 사이와 사이가 만들어내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형의 움직임이다.

조은지의 흙과 몸이 만들어내는 원형의 움직임에서 ‘ré- volte’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Révolte’는 ‘반란’의 프랑스 단어이다. Révolte의 어원은 라틴어 동사인 ‘volvere’와 ‘voluere’ 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용돌이 속에 휘몰아치다’라는 의미로 원을 그리며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처럼 기존의 질서를 흐트러트린다. 이 15~16세기경에는 이탈리어 ‘volu- ta’, ‘volta’ 나 ‘voltare’와 같은 단어에서 영향을 받아 시간과 공간의 두 가지 의미로 읽히게 된다.

시간적으로는 ‘원형의 움직임’의 의미에서 확장된 ‘시간의 되돌림’, ‘시간의 역전’을 읽을 수 있고, 공간적인 의미로는 ‘enveloppe’과 ‘couverture’ 즉, ‘감쌈’과 ‘덮음’을 의미한다. 조은지의 흙과 몸의 작업은 이러한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반란의 모티브로부터 행해진다. 통상 ‘반란’이라는 단어가 갖는 정치적이고 행동지향적인 협소한 의미를 벗어나 작가 자신의 반란과 흙이라는 물질의 반란을 읽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작가가 추구하는 ‘내밀한 반란 révolte intime’은 작가로부터 물질로, 퍼포머로 그리고 우리에게로 전해진다. 혁명이 가능한 곳은 단지 ‘행동’의 영역이 아니다. 혁명은 정신적인psychique 세계와 정신 세계의 사회적인 발현(글쓰기, 사상, 예술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문화적인 반란은 내재적으로 도시(인간 이 만든 공동체)의 삶에 관여하고, 결과적으로 문화적인 반란은 깊이 정치적으로 관여한다. 문화적인 반란은 ‘또 다른’ 정치적인 문제를 제시하는데, 바로 지속적인 충돌이다.” 1 작가 조은지의 반란은 이렇게 부드러운 진흙과 조심스럽게 그러나 끊임없이 움직이고 연결을 끊지 않는 퍼포먼스의 신체들로부터 작업을 마주하는 우리의 ‘내밀한 반란’에 호소한다.